essay

사이에서 생각한 한국성

· bcho partners 『핀업보드』 북토크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졸업설계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기이지만, 생각보다 막막함이 크다. 기존과 달리 땅도, 주제도, 프로그램도, 맥락도 모두 자유로운 상태이다 보니 오히려 더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아침 일찍부터 서울에 올라갔다. bcho 파트너스가 『핀업보드』라는 이름의 책을 출간했고, 며칠 뒤 이 책에 대한 북 토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조병수 건축가와 bcho 아키텍츠의 작업을 오래전부터 좋아해왔고, 그가 언급해온 한국성과 미학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었다.

특히 이 책은 조병수라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bcho 파트너스의 세 건축가인 윤자윤·이지현·홍경진 건축가가 파트너로서 수행해 온 작업과 그에 대한 건축관과 태도를 다시 돌아보는 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웠다.

책에서는 각기 다른 작업을 해온 세 건축가들이 맥락도, 규모도, 프로그램도 전혀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도 어딘가 하나로 수렴되는 방향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작고 귀여운 책에다 내용도 흥미로워서, 책을 구입하고 한 번,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두 번 읽고 북토크에 참석했다.

우리는 설계 스튜디오와 이론 수업을 통해 현대 건축의 거장들의 프로세스와 다이어그램, 건축 철학과 도시 설계 방법론을 학습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습의 과정 속에서 내가 속한 한국의 건축과 공간, 즉 ‘건축에서의 한국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깊이 고민할 기회가 적다.

특히 근대 이전의 전통 건축이나 한옥이라는 유형적 이미지가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한국적인 정서와 태도, 혹은 바이브(vibe)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조병수 건축가는 오래전부터 ‘막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막(mak)이란 막사발이나 막춤처럼 정제되거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능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 다시 말해 ‘이 정도면 됐지’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롭고 너그러운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지나치게 완벽하고 깔끔한 대상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미학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는 거칠지만 흉하지 않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따뜻하며, 감정이 배어 있는 느낌이 읽힌다. 이러한 태도에서 어딘가 한국적인 감각이 드러난다고 느낀다.

관계를 맺는 방식

『핀업보드』에서 세 건축가는 각자의 작업을 세 가지 테마로 묶는다. 윤자윤 건축가는 자연 속에서의 건축을, 이지현 건축가는 도심 속 잉여공간의 건축을, 홍경진 건축가는 재생건축, 혹은 적응자로서의 건축을 이야기한다.

세 주제는 다루는 맥락도, 대상도, 규모도, 프로그램도 모두 다르며 작업이 생성되는 과정과 방법 또한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업에는 공통된 태도가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자연 속 건축에서는 자연과 비자연, 즉 공간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잉여공간의 건축에서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과 건축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재생건축에서는 옛것과 새것이라는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의 관계를 유연하게 조정한다.

세 건축가 모두 건축을 통해 어떤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기존의 조건을 강하게 통제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려는 태도 또한 한국성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변화무쌍한 기후 조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특정 환경에 완벽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유연하게 적응하는 태도를 선택해왔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근대 이전의 전통 건축에서 나타나는 처마나 툇마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공간 요소다. 이 공간들은 지극히 기능적인 필요에서 출발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비를 피하기 위한 처마는 대청마루에서 풍경을 프레이밍하는 장치가 되고, 방과 방을 잇기 위한 툇마루는 머무름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는 조병수 건축가의 막의 미학과도 연결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bcho 파트너스의 세 건축가가 보여주는 작업 태도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이들의 작업은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인식하고 이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며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놓인 건축은 물리적 오브제로서 자연을 점유하기보다, 건축이 놓임으로써 오히려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핀업보드』에서는 이러한 작업 태도를 ‘framing’으로 설명하며, 건축을 관계를 생성하는 주체가 아니라 관계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장치로 바라본다.

잉여공간의 건축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도심 속 공간을 인지하고, 건축을 통해 그 공간이 맺고 있던 관계를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한다.

재생건축 또한 옛것과 새것의 병치와 공존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객체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기보다 유연하게 형성하고, 그 의미를 시간 속에서 강화한다.

이러한 세 작업은 조병수 건축가의 철학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사유가 bcho 파트너스에 의해 연장되고 확장되며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관계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기보다, 이미 전제된 관계가 공간 속에서 스며들고 드러나도록 조정하는 건축적 태도를 보여준다.

사이에서 생각하기

졸업설계 주제를 정하며, 나는 한국적인 공간성이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층위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또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사이(sai)’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가 근대 건축의 이분법적 공간 구조를 비판하며 ‘In-Between Space(사이 영역)’를 통해 인간 관계의 회복을 이야기했다면, 한국의 ‘사이(sai)’는 이러한 관계를 의도적으로 계획하기 이전에 삶의 방식과 관습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 온 공간적 상태에 가깝다.

한국의 ‘사이’라는 단어는 두 대상 간의 물리적 간격을 의미함과 동시에, ‘친구 사이’, ‘어색한 사이’와 같이 비물리적 관계의 밀도와 감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사이는 관계를 의도적으로 생성하기 위해 구성된 공간이라기보다, 관계가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이를 강화하고 스며들게 하는 공간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알도 반 아이크의 In-Between Space와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핀업보드』와 북토크에서 언급된 ‘관계의 건축’과도 맞닿아 있는 개념일 수 있겠다.

물론 한국성과 한국적인 것은 이런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던진 생각이지만,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야?’라는 의문이 스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분명 고민해볼 만한 질문이었고, 조금 막혀 있던 나의 생각에 하나의 실마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시간도 아깝지 않았다. 졸업설계를 진행하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더 생각하고 작업해야겠다.

하루를 투자해 다녀왔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글로도 남겨본다.

사이에서 생각한 한국성